블로그의 소개말로 ‘서사의 위기 속에 살아남기 위해 글을 씁니다.’라고 했다. 세상에 내 눈이 가려지고 ‘나’라는 존재가 멍하니 삼켜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블로그는 ‘나’라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공간인 셈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살아가길 원하오, 내 삶의 목표는 이렇다오, 하면서.
‘나’라는 존재는, ‘나’를 가장 잘 알면서도 모른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 보내며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만 정작 가장 내 모습을 쳐다볼 수 없기도 하다. 내가 듣는 목소리와 남이 듣는 내 목소리조차 다르다. 이 글은 그런 ‘나’라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판단을 내리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만,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고,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고, 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의 문장은 헤르만 헤세의 책, ‘싯다르타’에 나오는 문장이다. 남들에게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기는 쉽다.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쉽다. 쉽게 말을 내뱉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쉽게 밀린다. 사색하고, 성찰하고, 의심하고, 많은 것을 경험해 보는 그런 느릿한 걸음으로 더듬대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해야 하는데 내 주의를 끄는 온갖 바쁘고 중요하고 재밌어 보이는 것들 속에서 항상 덜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욕망을 자극하고 또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나를 흔든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외면받기 쉬우나 ‘나’를 잘 알지 못함으로써 오는 문제에 너덜해졌을 때야 나를 돌아본다. 사실 많은 고통도 ‘나’를 쳐다보고 알아가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들여다보고 알아갈 때 불편하고 인정하기 싫은 모습들도 마주한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모습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사랑의 시작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된다. 누군가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을 나 자신에게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내 모습들과 끊임없이 방황하는 마음으로 입체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나’의 모습들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선, 악, 취향, 마음, 허무, 사랑을 비롯하여 자애롭고, 추잡하고, 찌질하고, 답답하고, 계획적이고, 막 나가고, 다정하고, 매몰차고, 안절부절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포기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애도하고, 강인하고, 유약하고, 꿋꿋하고, 휘청거리는 모든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욕망에는 끝이 없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욕망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과 같다.
다만 그렇다고 한들 이 정도면 ‘나’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연속되는 시간 안에 ‘나’라는 존재는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독립되어 있다. 세상이 항상 변하는 것과 같고 불과 두어 달 전에 작성한 코드를 읽을 때도 타인의 코드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과 내가 변한다는 것, 내가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나’를 계속 들여다봐 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나를 알아간다는 것일 테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끝나지 않는 숙제일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관계도, 브랜딩도, 성장도, 성취도 모두 ‘나’로부터 출발하는 일이다. 시작점도 없이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어렵다. 특징도 한계도 모르는 제품을 마구잡이로 휘두를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나’를 더 알기 위한 시도로 강점혁명 검사를 진행했다. 나는 지적 사고 - 화합 - 절친 - 적응 - 공감에 강점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각 테마의 설명을 읽으며 공감이 많이 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했다. 내가 평소에 그리려고 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며 검사를 진행해서 내 해석이 덧씌워진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닐까? 이 테마들이 정말 자연스러운 나를 나타내는 특징들일까? 에 대한 의심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으므로 주변 동료와 지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이고, 결과도 이렇게 나왔으면 그냥 당신은 그런 사람인 것 아닐까요?’라는 말에, 되고자 하는 모습을 되뇌이면 그런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처럼,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를 알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다. 이건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의 성장을 생각한다면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 강점을 알아봐 줄 환경과 이 강점을 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약점을 드러내 줄 수 있을 환경과 이 약점을 보완하는 것을 지지해 줄 환경. 이런 환경은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기도 하지만, 운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더욱 크다. 내가 태어난 시대, 나라, 가정, 성별, 재능, 건강, 취향 등이 그렇다. 예전에 읽었던 '공정하다는 착각'이 떠오른다. 만약 우리가 시대로부터 인정이라는 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운의 역할이 크다. 이 말은 언제나 겸손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일깨워준다.
그렇기에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의 본질과 노력과 한계와 행운을 동시에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