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글
돌이켜보면 글이라는 녀석은 항상 내 손 닿는 곳에 있었다. 어린아이 때는 삼국지나 마법천자문 같은 만화책들이, 10대에는 판타지와 무협 소설들이 나와 놀아주었다. 자라고부터는 내 부족한 역량들을 채워주고, 인생의 조언을 건네주고, 사는 것이 힘겨울 때마다 대들보처럼 나를 지탱해 주었다. 모든 책은 그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서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작 읽을걸, 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자주 한다.
대개는 읽는 것이었으나 작게는 글을 쓰기도 했다. 특히 노션을 사용하고 나서 글을 쓰고 기록하는 것의 절대적 양이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증가했다. 매일 업무 일지를 남기기도 하고, 디버깅 내용, 설치 방법, 특정 이슈에 대한 대응 방식, 각종 스터디 자료, 이직 준비, 사이드 프로젝트 구상 및 진행 내용, 각종 회고, 후기, 에세이 등… 온갖 것을 모두 노션에 적었다. 문서를 관리하는 방식도 참 많이 바뀌어 갔는데, 이제는 많은 문서들이 Deprecated 그룹 안에 들어가 있다.
다만 평소라고 할 만한 시간이 있다면 그중 대부분은 글을 찾지 않았다. 더 쉽고 자극적인 게 지천으로 널린 세상이니 너무 쉬운 선택이었다. 이번에 소회를 밝히니 드는 미안한 감정과 앞으로 나는 계속 읽고 쓰는 사람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겹쳐 지난 날들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글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미안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글
문화 소비자 시점, 책과 영화에 대한 후기를 남기던
재밌게 본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부터 있어 한 번씩 혼자 끄적거리고는 했는데, 본격적으로 후기를 남기기 시작한 것은 북이영화라는 독서 모임을 하고서부터였다. 매주 일요일 오전에 같은 책 또는 영화를 보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3년 좀 넘게 하다 각자의 삶이 바빠져 이제는 멈춘 시간 속에 있다. 작품 선정이나 책과 영화의 빈도에 있어 몇 번씩 조정하면서 진행 방식을 바꾸기도 했다. 같은 작품을 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즐거운 자리들의 연속이었는데, 이 생각들이 기록되지 않는 것이 아쉽고 많게는 1년에 도합 1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소비하면서 휘발되는 것이 아쉬워 개인적으로 별점과 한 줄 평, 그리고 자세한 후기를 남기기 시작했다.
어떤 기준을 세우기보다 주관적 느낌으로 별점을 부여했는데, 나중에 하향 조정되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본 직후에는 조금 더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형성된 느낌이 지금도 작품을 보고 나서 별점을 생각할 때면 사용된다. 5점 만점에 5점을 준 작품은 1년에 10개가 채 되지 않았고, 0점을 준 작품들도 있었다. 한 줄 평을 고민하기도 참 많이 했다. 이동진 평론가님은 어찌 그리 요연하게 쓰시는지, 써보니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어떤 작품의 후기는 채 몇 줄이 되지 않기도 했고, 어떤 작품은 몇 시간에 걸쳐 쓰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한동안 망연한 채 현실을 부정하고, 노션 AI보고 찾아내라고 닦달에 닦달을 했다. 분명 있을 거라고, 찾아내라고. 아카이빙하고 관리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노션 페이지 관리 체계를 변경할 때 잘못해서 삭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썼던 많은 후기 중 이제 남은 것은 브런치에도 올려둔 몇 개밖에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높은 별점을 준 작품들에 대한 정리가 모두 날아간 것이 무척 아쉽기도 하고, 플랫폼에 더 많이 올려둘 걸 하는 후회도 따라 든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는데 어쩌겠어. 이때 내가 써낸 글들을 이제서야 돌이켜보는 것 같다.
Weezip, 나의 기술 블로그
사람들이 개발자라면 기술 블로그 하나쯤 하고 있고, 프런트엔드 개발자라면 자기만의 웹 사이트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지 하는 시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사람들이 그렇다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낸 상상일 확률이 훨씬 높다. 혼자 만들어 낸 창에 찔리며 꽤 여러 번 기술 블로그를 만들겠다고 시도하다 무산되고는 했었다. 왜 만드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과 기대하는 바가 정의되어 있지 않았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 결국 Weezip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이 글을 쓰며 헤아려보니 23년 3월부터 25년 3월까지 2년 동안 총 81건의 글을 썼다. 처음에는 기술적 내용 외에도 문화 소비자 시점에서 쓰던 후기들을 비롯해 다양한 개인적인 글들도 같이 올리는 것을 목표했었다. 하지만 다른 성향의 글들이 한 곳에서 부딪히는 것을 보며 그 무엇에도 맞지 않는 공간이 되는 것 같아 기술이나 커리어 관련된 글들을 위주로만 올리게 되었다.
꾸준히 글을 썼는데 많은 원동력은 글또 커뮤니티 활동으로부터 왔었다. 2주에 한 편씩 글을 발행하는 것이 목표인데, 진행 기간 동안 패스 없이 완주하겠다는 목표를 지키기 위해 아득바득 글을 쓰던 날들도 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두 기수를 진행하며 목표는 모두 달성했다. 좋은 동기부여를 많이 받을 수 있었던 커뮤니티였다.
기술 블로그가 도움이 되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그렇다고 확신에 차서 대답해 줄 수 있다. 트래픽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SEO에 대한 기본적인 관리와 쓴 글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글을 쓰는 시간이 내게 남긴 것과 세상에 공개된 글이 내게 기회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서 과거의 내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다른 글로 엮어볼 생각이다.
링크드인, 글을 공유하고 생각을 남기는 공간
링크드인에 다른 사람의 글을 퍼온 것이 아니라 내 글을 처음 올린 것도 23년 3월이다. 글의 완성은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다. 개인 블로그를 개발해서 글은 썼는데, 플랫폼의 힘을 등에 얻지 않은 터라 읽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글을 홍보하기 위해 링크드인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블로그의 글로 엮기에는 짧은 경험이나 단상들을 링크드인에 써 올리기 시작했다. 주로 드문 대며 나타나는데 제품과 회사의 성장이나 개인의 커리어에 대한 생각들을 써내는 편이다. 그러다 링크드인의 글들을 묶어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더듬거리는 꾸준함이 나중에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만 있다.
Treefeely, 나의 이야기를 남기는 공간
서사의 위기라는 동명의 책을 읽고부터 이 단어는 내 오랜 숙제로 남아있다. 삶에 마침표를 찍을 즈음에나 가서야 숙제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나’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금까지 써오던 글이 아니라 정말 내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졌다. 읽히는가를 떠나서 ‘나’라는 사람이 가진 특이점을, 독창성을, 삶을 잘 갈무리해서 남겨두고 싶었다.
이걸 다른 플랫폼 위에 쓰고 싶지도 않았고, 내 다른 글들과 섞어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의 블로그를 또 열었다. 다만, 다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공간이 필요했으나 이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쓸 여유가 당시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Github에 공개된 좋아하는 분의 블로그 코드를 그대로 복제한 후 일부 설정만 변경해 꾸렸다. 이후 메시지를 보내 사용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좋은 글을 기대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렇게 좋은 글이라는 숙제도 생겼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써 남기는 곳이 여기다. 아득바득 글을 많이 쓴다거나, 뛰어나고 훌륭한 글을 남겨보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 근근이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한다.
Brunch, 책과 영화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 보면 내 감상을 기록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이전에 쓴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앞으로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상 결국 또 필요해진다. 이번에는 예전만큼 내가 본 모든 것에 대해 고민해서 별점과 후기를 남기기보다 가볍게 기록하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은 한 달 동안 읽고 본 것들에 대해 짧은 감상을 남기고 있는데, 크게 부담되지 않고 짧게나마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 달 동안 소비한 문화 콘텐츠를 회고할 수 있어 흡족하다. 읽다가 달이 바뀔 때는 마음 가는 대로 남긴다. 여기서 엄밀할 필요는 없다.
개인 SNS, 내 일상의 이야기
개인 SNS를 삭제한 지 2년이 되어갔다. 넘실대는 숏폼 콘텐츠에 무력하게 당하는 내가 싫어서 극단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는데, 지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내 시간과 정신을 지켜내는 득이 더 컸었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앱을 설치하고 로그인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개인 SNS를 살리는 것이 맞을까라는 고민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함도 엄정함도 객관성도 신경 쓰지 않고 주관적이고 사소하지만 삶의 희락과 고락이 담긴 글을 쓰기에 당장은 여기만큼 적절하게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2년간 숏폼을 끊다시피하고 내 목표를 세워두고 다시 시작한 덕에 쉽게 숏폼에 휩쓸리지 않고는 있다. 그러나 글을 쓰고 공유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플랫폼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여기서 만들어질 자극적 감정들에 대한 불안이 큰 곳이다. 더 적절한 공간을 찾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앞으로, 글.
올해를 회고하는 과정에서 더 생각하고 기록하고 공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던 친구이자 조용한 지지자였던 글을 이제는 대놓고 편애하려 한다. 사실 여기에는 서사의 위기 속 내 이야기를 남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전략적인 결정도 포함되어 있다. 고 찰리 멍거 선생님도 말씀하셨듯 다른 사람들은 잘하는데 내가 못 하는 게임을 하면 지기 마련이다. 내가 어디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지 알고 역량 범위 안에서 게임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글은 백전필태 할 게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후천적으로 갈고 닦다 보면 그 세월만큼은 내게 힘이 되어줄 것이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에 대한 고민의 답도 글이었다. 정성과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내가 담아낼 수 있는 매개체는 글이었다. 그 외에는 일말의 재능도 없다. 위에서 말했듯 내가 잘하는 게임을 해야 한다. 선물하는 데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것을 할 수는 없는 법이고 내 마음에도 드는 귀하고 소중한 것을 건네주는데 당연히 더 잘 주고 싶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갈고 닦으려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정확한 장애 보고서나 기술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글이 필요하다. ‘가난한 찰리의 연감’에서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지혜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아침의 피아노’에서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한 생애의 마지막을 글에 담아내는 것처럼 내가 써내는 것 또한 하나의 다양성으로 세상을 살아간 누군가의 생각으로 남아 읽혔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더 다양한 글을 읽고 써보려고 한다. 어떤 플랫폼에서 어떤 글들을 많이 쓰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링크드인과 개인 SNS에 저마다의 글들을 올리려 하는데 적어도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여러 플랫폼 모두에 같은 글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욕심이 많은 편이라 그랬다가는 글들이 서로 싸우며 자멸할 것 같다. 결국 매체는 수단일 뿐 중요한 것은 내 생각과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파블로프의 연상 효과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이길 수 없다면 우선은 합류하되 휩쓸리지 않는 게 최선이다.